여행의 기술
_알랭 드 보통
I. 기대에 대하여
언제 겨울이 왔을까? 계절은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듯이 서서히 쇠퇴해갔다.
12월이 되자 새로운 계절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거의 매일 불길한 느낌을 주는 강철 빛깔의 회색 하늘이 도시를 덮었다.
지난여름 더위가 한창일 때 땅에 드러누워 신발을 벗고 맨발로 풀잎을 쓰다듬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땅과 직접 접촉하자 왠지 마음도 자유롭고 느긋해지는 것 같았다. 여름은 실내와 실외 사이의 일방적인 장벽을 부수어, 나는 세상 속에서도 내 방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런 팸플릿만 보고도 강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는데, 사람의 계획이(심지어 인생 전체도) 아주 단순하고 어설픈 행복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 감동적이면서도 진부한 예였다.
나는 바베이도스 섬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여행이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하다.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흔히 잊곤 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아마 예술 작품에도 얼마간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들을 잘라내고, 우리의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이렇게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미지 않고도 삶에 생동감과 일관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보푸라기 가득한 현재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것이다.
이들에 대한 나의 관심은 어울리지도 않고 관계도 없는 다른 수많은 요소들 때문에 곧 시들해졌다. 그중에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얻은 목감기, 한 동료에게 내가 휴가를 떠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걱정, 양쪽 관자놀이를 눌러오는 압박감, 점차 강해지는 화장실에 가고 싶은 욕구 등이 있다. 중요하지만 그때까지는 간과해왔던 사실 또한 차츰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을 이 섬에 데려왔다는 것이다.
마음은 불안, 권태,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슬픔, 경제적인 걱정에 몰두했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데제생트라면 금방 알아챘을 또 하나의 역설 속에서, 우리가 어떤 장소에 가장 온전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그곳에 가 있어야만 한다는 추가의 부담에 직면하지 않을 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 오후 선크림과 에어컨 냄새에 눈물 섞인 냄새가 뒤섞이는 비참한 상태에 빠져들자, 인간의 기분을 지배하는 엄격하고 무자비한 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육지의 사진을 보고 그런 웅장함에는 행복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상상했던 순간에는 위험하게도 무시해버렸던 논리였다. 아름다운 대상이나 물질적 효용으로부터 행복을 끌어내려면, 그 전에 우선 좀더 중요한 감정적 또는 심리적 이해에 대한 요구, 사랑, 표현, 존경에 대한 요구가 있다. 따라서 중요한 인간관계 속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몰이해와 원한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은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목조 오두막을 즐기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즐길 수가 없다.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더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