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Writing

슬리퍼를 신은 노인

yeminem 2023. 5. 3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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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같은 코스로 러닝을 하다 보면 익숙한 사람들을 스쳐간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이름 모를 사람들..
 
슬리퍼를 신고 걷는 노인이 있다.
오래된, 때가 많이 탄, 더러워진 슬리퍼를 신고 있다. 문방구에서 파는 삼선 슬리퍼다. 원래는 형광그린 색상이었으나 세월에 거뭇해져서 그 빛을 잃은.
 
장작처럼 마른 몸에 초라한 행색, 다리를 좀 저는듯한 어색한 걸음걸이. 항상 마스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이를 알 수 없지만 대략 60대 초. 중반 정도로 보여진다.
 
'왜 매일 걷는 걸까?', '무슨 사연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가지만 금세 사라지고 만다.
그보다 '이 길만 왕복해도 대략 4km의 거리인데..  왜 매일 맨발에 슬리퍼로 걷는 걸까? 운동하러 나온 목적은 아닌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신발을 1~2켤레 나눠주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첫째, 말을 붙일 수 없다.
내 성향에 그런 친화력은 어렵거니와 특유의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에 감히 접근조차... 라며 생각을 거두고 만다.
둘째, 신발사이즈가 맞지 않을 확률이 90% 이상이다.
셋째, 어려운 확률로 신발사이즈가 일치한다 해도 그의 반응을 예상할 수 없다.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뭔가 마법을 부려 나를 지구반대편으로 날려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최근 두~세 달 사이 가장 많이 마주친 사람. 매일 나오는 모양새다. 나는 러닝코스에 가끔 변화를 주기도 하고, 매일 정확히 같은 시간에 나가지는 않기 때문에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최소한 나보다 훨씬 오래 이 산책로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보내온 사람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지난번에 비 오는 날, 거의 자연을 독차지 하고 달리던 그날에도 마주쳤다. 아무도 없는 비 오는 그 길을 우산을 쓰고 특유의 느린 걸음으로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여전히 맨발에 슬리퍼차림으로.
 
 
최근의 일이다. 일주일정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궁금했지만 그 생각은 짧은 바람처럼 등뒤로 스쳐갈 뿐이다.
 
대략 일주일쯤 지난 후 다시 마주쳤다. 같은 모습에 같은 걸음걸이 같은 분위기
왜 한동안 보이지 않았는지 순간 알 것만 같았다.
신발이 바뀌어 있었다.
연녹색, 연한쑥색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겠다.
다이소 욕실화(3천원)를 신고 있었다.
이전에 정확히 같은 슬리퍼를 구매해서 사용한 적 있기 때문에 알고 있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분인 것 같다.
나도 초록계열을 좋아한다.
푸르름
연두, 그린, 카키, 진녹색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연두
국방색, 에메랄드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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